단상

샐러드 같은 글쓰기

cTHUgha 2022. 2. 13. 16:11

첫 문장, 그리고 첫 문단을 쓰는 것이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것은 익히 들어왔다. 그래서 옛말에 시작이 반이라고 했던 것일까? 오죽하면 글쓰기를 시작하는 것에 대한 책이 나와있을까. 수년 전부터 글을 쓰려는 시도는 여러 번 했었다. 다이어리에도 손으로 써보기도 하고, 나만 볼 수 있는 어플에도 끄적거려보긴 했다. 그럼에도 글을 쓴다는 것, 글을 시작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웠다. 첫 문장부터 턱턱 막힌다. 습관은커녕 '행위의 반복' 근처까지 오지도 않는다. 가벼운 단문 몇 문장 쓰는데도 몇 시간이 걸리고 한번 쓰면 다음 글을 쓰기까지 몇 주가 넘게 걸렸다.

 

옵시디언 노트를 알고 나서는 조금 해결될 줄 알았다. 제텔카스텐을 만든 루만 교수님처럼 내가 쓸 수 있는 재료가 많아지면 뚝딱뚝딱 쓸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아직도 나의 독서 및 정보 습득 습관은 처리보다는 저장에 익숙해져 있다. 제텔카스텐의 핵심은 결국 아웃풋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는데... 루만 교수님처럼 글감을 창조하는 사고 과정은 그 자체로 어렵고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그리고 그 인사이트, 혹은 결과물이 가치가 있느냐고 자문했을 때 확신이 없다.

 

이쯤 되면 내가 취미를 하려고 독서와 글쓰기를 하려는지 노동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몇달 전에는 30일 매일 글쓰기를 하는 책도 사서 아무도 안 보는 네이버 블로그에 짬짬이 시도했다. 주제도 매일 정해주고 아무도 봐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그럭저럭 써볼 수 있었다. 하지만 제대로 각을 잡고 여기에 써보려고 하면 다시 도돌이표인 것 같다. 글감이나 인사이트가 떠올랐을 때도 당장 써봐야겠다는 생각 대신에 '이미 누군가 다 잘 정리해놓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대여섯 개 정리해놓은 옵시디언 노트에 대한 정보글도 마찬가지의 이유로 멈춰있다. 이미 잘 쓰여 있는 레퍼런스를 보면 머릿속의 미완성 글감이 떠오르며 부끄러움이 먼저 올라온다. 요리로 비교하자면, 냉장고에 재료는 많고, 나 혼자 먹을 것은 어떻게든 대충 요리해보겠는데, 손님에게 선보이는 정도의 요리는 못하는 그런 상황이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샐러드같은 글쓰기를 해보려고 한다. 학술적으로 완성된 요리법으로, 최고의 재료를 찾아 정밀한 배합을 하여 최고의 맛을 내서 손님에게 선보이는 요리와 같은 글쓰기는 나중에 해보려고 한다. 지금은 그냥 냉장고에 남아있는 야채랑 과일 몇 개 꺼내서 내가 자르고 싶은 대로 쓱쓱 잘라 대충 소스와 버무려낸 샐러드 같은, 그냥 친구와 가볍게 앉아 먹을만한 정도의 글쓰기를 많이 써보려고 한다. 그렇다고 저번처럼 아무도 안 보는 네이버 블로그에 글을 쓰지는 않고, 몇 명이라도 방문자가 꾸준히 유지되는 이곳에 올려보고자 한다. 샐러드 정도의 글쓰기에 익숙해지면 빵도 굽고, 소시지도 익혀서 손님을 대접할 수 있는 브런치 정도 되는 글쓰기는 할 수 있지 않을까?